김도연 원장] KBS 뉴스_가스라이팅 ‘노예 10년’…못다 한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1-10-13 10:27 조회 1,199회관련링크
본문
■'과외교습소 원장과의 인연' 시작
30대 중반 여성 이모 씨가 50대 여성 박모 씨로부터 과외를 받기 시작한 땐 이 씨가 중학생이던 2003년이었습니다.
이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3년 반 동안 과외교습소인 박 씨의 집에서 과외를 받았습니다. 당시 박 씨는 이 씨에게 친절하고 친밀한 과외 선생님이었습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이 씨에게 박 씨는 "성격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냐, 나를 따라오면 인생을 바꿔주겠다"라면서 인생 멘토를 자처했습니다. 교육을 전공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박 씨의 말에 따라 대학과 전공까지 결정했습니다.
■과외교사로 일하면서 '가스라이팅' 시작
대학 진학 뒤, 이 씨는 박 씨의 집이자 과외교습소이던 아파트를 오가며 과외교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즈음부터 박 씨의 은밀하고도 집요한 가스라이팅이 시작됐습니다.
이 씨에게는 말 못할 가정사가 있었는데, 그 가정사를 계속 들춰내며 부모와의 관계를 이간질했습니다. 이 씨는 처음에는 당연히 자신의 부모를 험담하는 말이 싫었지만, 설득력 있게 꾸준히 이어진 설득에 넘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미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이 씨가 박 씨에게 의존한 뒤부터 휴대전화도 박 씨가 관리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씨는 이 씨의 휴대전화로 꾸준하게 이 씨인 척 가족과 친구들과 연락했습니다. 내용은 주로 이간질이었습니다. 욕설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씨가 주변과 관계를 끊도록 만들면서 이씨를 사회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이 씨가 완전히 박 씨에게 의존하게 한 겁니다.
■상습 구타와 학대…"음식물 쓰레기와 자신의 인분까지 먹여"
이 씨는 대학 졸업 뒤 본격적으로 박 씨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상주 과외교사로 일했습니다. 과외교사이자 식모였습니다. 이때부터 지난해 말까지 지옥 같은 10년이 이어졌습니다.
발음이 이상하다며, 걷는 게 이상하다며, 입지 말라는 속옷을 입었다며,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냉장고 정리를 안 했다며, 갖가지 트집을 잡아서 이 씨를 폭행했습니다.
폭행 도구는 맨주먹, 행거에 옷을 거는 쇠막대기 등등 가리지 않았습니다. 차마 보여드릴 수 없지만, 취재기자에게 보여준 이 씨의 폭행당했던 몸 사진은 보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였습니다. 엉덩이와 팔, 등, 얼굴, 다리 등 온몸에 피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이 씨는 박 씨가 때린 곳을 집요하게 계속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옷을 벗겨 베란다에 내보내 감금하기도 했습니다.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을 쟁여놨다며, 생선 가시 같은 음식물쓰레기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방바닥의 머리카락과 먼지, 화장지를 뭉쳐 먹이기도 했습니다. 화장실의 인분을 종이컵에 담아 먹이기도 했습니다. 먹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며 반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인분까지 먹이려 했는데, 왜 뿌리치거나 도망가지 못했어요?"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물어봤습니다. 이 씨는 박 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일 것 같았다고 답했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세뇌와 폭행이 몸과 마음을 마비시킨 것 같았습니다.
두어 차례 탈출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경남 창원 집 근처에 숨어 있었지만 결국 들켜 끌려갔다고 말했습니다. 도망가 잡혀 온 직후 박 씨는 이제 잘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지만, 이내 도망갔었다는 것을 이유로 한 무지막지한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멍은 기본이었고 온몸이 부었고 탈모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옷과 화장으로 가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일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돈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친부모로부터 받은 학비와 생활비 수천만 원도 빼앗겼습니다.
노예 같았던 10년, 이 씨가 마지막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씨 같은 피해자가 한 명 더 생겼기 때문입니다.
■내연남 딸까지 가스라이팅…폭행과 학대 이어져
20대 초반 김모 씨는 최근 2년여 동안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박 씨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친모와 이혼한 뒤 내연관계이던 박 씨와 함께 살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김 씨 역시 박 씨의 가스라이팅 대상이었습니다. 친모와의 관계를 이간질했고 과외 일을 돕게 하면서 같은 수법으로 김 씨를 세뇌했습니다.
이어진 건 역시 폭행이었습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쇠막대로 머리와 등, 팔뚝, 엉덩이를 적게는 30대, 많게는 50대씩 때렸습니다.
견디다 못한 김 씨는 이 씨와 함께 지난해부터 폭행당한 서로의 몸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면서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고, 함께 탈출하면서 가스라이팅의 끝을 맺었습니다.
■두 가스라이팅 피해자 서로 의지하며 탈출
둘은 탈출을 하고 나서도 박 씨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취업을 해야 했지만, 기록이 남아 다시 붙잡히는 빌미가 될까 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농촌에서 일용직 일손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기를 수개월, 겨우 김 씨의 친인척과 연락이 닿으면서 변호사와 접촉하게 됐고, 이 사건은 그제서야 수사기관과 법의 테두리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상한 상황을 말하는데, 이 사건을 담당한 박미혜 변호사는 두 피해자가 이 증후군을 가진 것처럼 가스라이팅을 통해 가해자인 박 씨에게 오롯이 몸과 정신을 지배당한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창원지방법원은 명백한 가스라이팅 범죄로 보인다며, 박 씨에게 상습특수폭행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박미애 변호사는, 가해자 박 씨의 가스라이팅 형태로 봤을 때 박씨 주변에 가스라이팅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 8월 창원지법에서 1심 판결이 난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피해자들을 만날 방법이 없어 단순 판결 기사로 보도했는데, 뉴스를 보고 피해자들이 변호사를 통해 연락을 해왔습니다.
가해자가 구속되고 판결 소식이 뉴스로까지 나가니까 자신들이 아주 심각한 피해를 봤음을 알게 됐고, 피해 내용을 상세히 알리고 싶다는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보도를 요청했습니다.
두 피해자는 더 충격적인 학대 내용이 있다며 경찰에 추가 고소를 한 상태입니다.
뉴스 뒤, 아무리 그래도 장기간 이어진 폭행을 왜 견디고 있었냐고, 왜 탈출하지 못했냐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스라이팅 범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은희 경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화장실 안에 오래 있으면 화장실 특유의 냄새를 못 느끼지만, 화장실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면 그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가스라이팅도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는 자각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은밀하게 상황을 조작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세뇌하는 데 능숙합니다. 피해자가 일단 세뇌당하고 나면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고 가해자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번 사건처럼 엽기적인 범죄로 치닫기도 하지만 일상의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범죄에도 가스라이팅이 내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가스라이팅 예방법은?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에서 낸 가스라이팅 자가진단 점검표가 있습니다.
● 왠지 몰라도 결국 항상 그 사람 방식대로 일이 진행된다
● 상대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이게 네가 무시당하는 이유야", "비난받아도 참아야지",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어", "너 혼자 상상한 것이겠지" 등의 말을 들은 적 있다.
●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변명한다.
●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잘못한 일이 없는지 점검하게 된다.
● 그 사람이 윽박지를까 봐 거짓말을 하게 된다.
● 그를 알기 전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인간 관계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피해자 잘못이 아니니 자존감을 가지고 의심 가는 관계를 주변 여러 사람에게 알려서 조언을 얻으라는 건데요.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출처] - KBS 뉴스
[기사 원문]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308&ref=A